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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이철웅 한국인간관계연구소장, “나는 부끄럼을 아는 사람인가?”

메타TV뉴스 | 입력 : 2024/01/12 [10:44]

 나는 부끄럼을 아는 사람인가?

이 철 웅 ()한국인간관계연구소 대표

 

최근 “인격실격‘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 아오모리 현 쓰가루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자가 된 집안의 경력은 그가 평생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였고, 이후 그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 이 철 웅 (사)한국인간관계연구소 대표     ©메타TV뉴스

그는 동경대학 불문학과에 입학해서는 편향적인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1930년 작가 이부 세마스지의 제자가 되어, 자신의 유머와 풍자 감각을 다듬어 가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한다.

 

그는 고교시절에는 신경안정제 과다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으며, 그 후에 연인과 함께 투신자살을 기도했지만 홀로 살아남아 자살방조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이런 전력이 있는 그는 1945년 일본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그는 정신적 공황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 몇몇 작가와 함께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 작가로 부각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데카당스’란 단어 자체는 프랑스어로 '퇴폐', '쇠락'이란 뜻을 가지고 있지만, 19세기 프랑스에서 시작한 문예사조로서 데카당스는 '퇴폐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적인 것'을 지칭한다.

 

이는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적인 조형 그 자체를 탐닉하는 예술을 말하기도 한다. 이런 사조에 대하여 철학자이자 작가인 니체는 이러한 예술관을 노예도덕을 정당화하는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발표된 ‘인간실격’은 ‘퇴폐와 파멸’이라는 느낌을 기저에 깔고 있는 다자이 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결국에 1948년 연인과 함께 다마가와조스이에 투신해,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다자이 오사무는 평생 자살을 지향했던 작가라는 평가 받았는데, 결국 그는 1948년 운명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의 네 번째 자살 시도는 그의 대표작 ‘인간실격’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그 부유함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요조’의 삶에 대한 내용이다. 내용이 전반적으로 작가의 일생과 비슷하기에 소설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자서전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간 실격’은 ‘나’라는 화자가 서술하는 서문과 후기, 그리고 이 작품의 주인공 요조가 쓴 세 개의 수기로 구성되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요조는 일반 세상에 동화되기 위해 ‘익살꾼’을 자처하지만, 실패하게 되고, 결국 마약에 중독되고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거듭된 동반 자살 기도에서 여자만 죽고 혼자 살아남은 요조는 마지막에는 친척들에게 외면을 당해 외딴 시골집에서 쓸쓸히 죽음만을 기다리는 ‘인간 실격자’가 되고 만다는 내용이다.

 

‘인격실격’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자기 이해를 찾자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맹자는 그의 4단(端) 중에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밝힌 것은 동물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이 옳지 못함을 싫어하는 마음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도를 논의할 수 없다”는 가르침을 계승했다. 공자가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정명(正名)의 정치철학을 표방한 것은 이를 사회화한 것이다.

 

공자가 말한 것은 사회적 신분이 있는 사람은 그 신분에 어울리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고,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다는 것은 그 위치에 상응하는 태도를 갖추지 못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가정에서 자식다운 행동과 부모다운 행동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건전한 가정이 될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기업가다운 기업인과 종사자 다운 종사자들이 제 역할을 다할 때 우리 사회는 순순환 구조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환언한다면 지도자다운 지도자, 종교인다운 성직자, 지식인다운 지식인들을 바라는 국민적 소망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맹자는 주관적 감정인 이 부끄러움을 보편적인 도덕철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누구나 갖고 있는 도덕적 본성을 돌아보도록 했다.

 

그는 공자가 “스스로 반성해서 의롭지 못하면 보잘것없는 천한 사람이라도 나는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없거니와 만약 스스로 반성해서 의로우면 천만인이라도 나는 가서 대적할 것이다”라고 대용(大勇)을 설파했다고 한다. 맹자는 “염치를 모르면 인간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불경에도 나타난다. 불경인 유교경(遺敎經)에서는 “만약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모든 공덕을 잃게 될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선법(善法)을 지니거니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사상가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공정한 관람자에 의해 인도되는 사회는 개인의 효용 극대화에 의해서만 인도되는 사회보다 더 행복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가르침에 비견하면 “나는 부끄럼을 알고 있는가?” 하는 문답에 이른다.

무의식중에 신호등을 무시하지 않았는지? 타인의 부당한 상황에 용기가 없어 외면하지 않았는지?

실로 부끄럼을 모르며 살지 않았나 하는 반문을 해 보기도 한다.

 

어느 현인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라 설파했다.

 

이 대목에 공자의 가르침인 견리사의(見利思義: 사사로운 이익에 앞서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의 뜻은 알고 있는데 실천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자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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